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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출생-사망 경력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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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도 1920 X 1080(PC용)
1. 개요
20세기를 이끈 거물급 정치인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인물.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장식한 인물.
미국의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어가는 민주당의 대표적인 리더.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줄여서 'FDR'이라고 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이며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리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번 대통령을 지낸 사람. 200년 넘는 미국 헌정 사상 세번 이상 대통령을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하다. 원래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이 없었으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로 중임까지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글로벌 위기 속에서 관례를 깨고 4선이나 하면서 비로소 헌법에 중임 제한이 추가되었다.
2. 일생
2.1. 성장과 젊은 시절
1882년 1월 30일,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시어도어와의 관계에 대해 숙부와 조카뻘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지만 상당히 촌수가 먼 편으로 이정도면 사실상 남남. 그의 조카딸 앨리너와 1905년에 결혼을 했다. 공교로운 건 시어도어가 공화당원이었던 반면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었다. 18세기에 루스벨트 집안이 갈라지면서 정치적 성향 또한 차이를 보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화당엔 시어도어의 아들들이 이미 진출해 있어서 블루 오션을 노린 것이다. 다만 사적으로는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에 대해 존경하면서도 언젠가는 넘고 갈 라이벌로 여겼다고.[5]
아버지는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14살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을 역임한다. 이때부터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다고.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출처가 없다)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는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낸다. 또 이때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즈벨트 곁에서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1905년 3월 17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게 먼 친척뻘(13촌이라고 한다)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근데 이후 부인 엘리너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추문을 일으켜 엘리너와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실제 루스벨트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루시와 재혼할 생각이었으나, 극구반대하는 어머니와 정치인생에 결코 도움될게 없다는 하우의 설득으로 루시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엘리너와 겨우 화해했고, 이후 루시도 다른 사업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주 밀회를 즐겼다는 말이 있으며 훗날 루스벨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2.2. 장애와 시련 그리고 재기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당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정강을 채택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어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참패하여 낙선한다.
더구나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에 걸리고,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 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 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
2.3. 대통령이 된 후
1932년 1월에 대통령직에 도전했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잔가라(Giuseppe Zangara). 잔가라의 총알은 빗나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사건에 대한 여러 이론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잔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잔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어느 설을 믿을지는 알아서 하자.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대통령이 된 후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우선 취임하자마자 바로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유명한 것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한 것. 또한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낸 사회복지법의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당시로써는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의 시행으로 1936년 무렵에는 실업률이 줄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등 경제가 개선되었다. 이런 공적에 힘입어 1936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어 재선되었다.
이때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이 폭풍 간지다.
2기 임기에서도 뉴딜정책을 계속 추진해 1939년 주당 44시간 노동을 확립한 공정노동표준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시급 25센트 이상의 최저임금을 보장했다. 그러나 2기 임기에서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몰아쳤고 특히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의 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 현대에 와선 고전학파들의 분석과 달리,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 와중 1940년 루즈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 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3선에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1940년이 딱 그 사이였던 것.
그리고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41년 일본의 삽질 진주만 공습 이후 루즈벨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그 직후 나치 독일 제3제국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미국은 한 번에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 방면으로 더글러스 맥아더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유럽 전선으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등을 파견하여 2차대전에서 미군이 큰 역할을 하게 했다.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머스 듀이[15]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당시에도 3선과 달리 4선은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며 이는 얼마 후 터진 태평양 전쟁으로 증명되었지만,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미국 전체가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3선 이상을 무조건 금지하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2.4. 승리를 눈앞에 두고…
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년 3월 말, 대통령은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숨이 멈춘 시각은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 거지만, 사실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이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시동안 멸망 직전에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기사회생한 프리드리히 2세의 전례의 재현을 꿈꾸지만…현실은 시궁창. 후임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맡았다. 이 때 트루먼은 영부인 앨리너의 전화를 통해 대통령의 부고를 접했는데 앨리너가 "트루먼 씨,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3. 평가
FDR은 수렁에 빠진 미국 경제를 살려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위대했던 미국 대통령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 미국 보수파들에게는 의외로 뉴딜정책의 성과가 알려진만큼 크진 않으며 실질적인 불황탈출도 전쟁이 주원인이었다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논리와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해줘, 이후 냉전 체제의 빌미를 줬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점을 들어 조지프 매카시 같은 미국내 극우파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이외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수용한 것도 그의 큰 오점으로 꼽힌다. 다만 루스벨트 시절은 영부인인 엘레너 루스벨트 등의 활약으로 반일감정은 몰라도 인종주의는 오히려 어느정도 해소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4선을 하며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을 받는다. 이전까진 명문화되어있지 않아도 알아서들 2선까지만 하고 말았는데, 루스벨트가 관례를 깨고 4선을 해서 그의 사후 3선 이상을 금지하는 헌법조항이 명문화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4기 도중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까지 집권한 것이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권력욕 때문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 물론 루스벨트 본인은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리버럴 진영에서는 일부 보수층의 주장처럼 뉴딜정책이 효율적인 정책이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미국내 파시즘의 등장을 막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나쁘면 객관적 수치랑 무관하게 사회는 극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역사적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미국에도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니. 또, 루스벨트 행정부 2-3기 때의 경기침체의 경우, 뉴딜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설과 오히려 재정지출 감소 때문에 즉 뉴딜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크루그먼)가 대립한다.
어쨌든 제법 논란의 여지를 남긴 대통령이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의 극복과 2차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어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하며, 오늘날에도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 업적 평가나 인기 순위를 조사하면 항상 세 손가락 내로 드는데, 2010년 시에나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마침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루즈벨트의 집권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성향 및 지지 기반이 서로 바뀌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루즈벨트가 일명 '뉴딜 동맹'이라 하여 소수인종-유태인-이민자-노동자-농민 지지층을 확보하게 되었고, 21세기 현재까지도 비백인 이민자 계열(특히 흑인 및 히스패닉)은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자리잡아있다. 반면 공화당은 링컨 이후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흑인 집단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적 성향 또한 뉴딜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은 시장 개입 및 복지 정책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리버럴 성향이 강해진 반면, 공화당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에 근거한 시장친화적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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